주식투자 능력에 유전적 요소 따위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투자 감각을 타고났지만, 자신은 타고난 감각이 없어서 손실을 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요람 위에 시세 표시기가 달렸던 것도 아니고, 펠레가 어린 시절부터 축구공을 갖고 놀듯이 주식시세 면을 갖고 논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GM 주가를 확인하려고 자리를 뜬 적이 없고, 어머니도 불황기에 AT&T의 배당금을 물어보신 적이 없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태어났던 1944년 1월 19일 다우지수가 하락했고, 내가 병원에 있던 주간에 더 내려갔다. 당시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린치의 법칙이 나타난 최초의 사례였다. 린치의 법칙이란, 린치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시장이 하락한다는 법칙이다.
내 친척들은 대부분 주식을 불신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일곱 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따라서 나의 삼촌들은 대공황 당시 성년이었고, 1929년의 대폭락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주식을 사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들어본 유일한 투자 사례는, 할아버지 진 그라핀이 씨티즈 서비스 주식을 매수한 경우다. 할아버지는 매우 보수적인 투자자였으며, 이 회사를 선택한 것도 수도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뉴욕으로 여행했을 때 이 회사가 석유회사라는 사실을 발견하자 곧바로 팔아버렸다. 그 후 씨티즈 서비스는 50배가 올랐다.
1950년대 전체 기간은 물론 1960년대에 들어서도 미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주식을 불신했지만, 이 기간에 시장은 세 배로 뛴 데 이어 다시 두 배로 뛰었다. 1980년대가 아니라 내가 어렸던 이 기간이 역사상 최고의 강세장이었지만, 삼촌들은 주식투자를 도박장의 주사위 노름처럼 취급했다. 사람들은 경고했다. "주식시장은 근처에도 가지 마라. 너무 위험해서 재산을 모두 날리게 된다."
돌이켜보면, 1950년대처럼 주식시장에서 재산을 모두 날리 위험이 적었던 시기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이로부터 나는 시장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배웠을 뿐 아니라, 소액투자자들은 잘못된 시점에 시장을 비판하거나 낙관하기 때문에 강세장에 투자를 시작하고 약세장에 빠져나오면서 자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수학 교수를 거쳐 존 핸콘에 최연소 감사가 된 근면한 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병에 걸렸고, 열 살 때 뇌암으로 돌아가셨다. 이런 비극 때문에 어머는 직장 생활을 해야만 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머니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열한 살 때 나는 캐디로 일했다. 이날이 1955년 7월 7일이었고, 아우지수가 467에서 460으로 떨어진 날이었다. 골프를 배운 열한 살 소년에게 캐디는 기막힌 일자리였다. 나는 단지 골프 코스를 돌아다니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배달 소년이 일주일 내내 아침 6시부터 신문을 배달해서 버는 돈보다, 내가 오후 한나절에 버는 돈이 더 많았다. 이보다 나은 일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캐디 일에 더 미묘하고도 중요한 장범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보스턴 교외에 있는 브래 번 같은 회원 전용 클럽이 그랬다. 질레트, 폴라로이드, 게다가 피델리티 등 주요 기업의 사장들이 내 고객이었다. 조지 설리번의 공을 찾아주다 보니, 결국 내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브래 번 같은 클럽의 탈의실을 거쳐서 중역으로 고속 승진한 캐디가 나뿐이 아니었다.
주식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골프 코스는 중권거래소 입회장 다음으로 좋은 곳이었다. 특히 회원들은 드라이브로 슬라이스나 훅을 친 다음에는 최근에 거둔 투자 성공담을 열정적으로 늘어놓았다. 한 라운드를 도는 동안 내가 골프 요령 다섯 가지를 알려주면, 회원은 그 대가로 주식 정보 다섯 가지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얻은 정보를 이용해서 투자할 돈은 없었지만, 페어웨이에서 성공담을 들은 뒤 주식시장이 돈을 잃은 곳이라는 우리 가족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 고객 가운데 여러 사람이 실제로 주식시장에서 돈을 번 것 같았고, 일부 성공담은 내 마음에 실감 나게 와닿았다. 캐디 일을 하다 보면 얼마 안 가서 골프 회원들을 카스트제도 기준으로 분류하게 된다. 가장 높은 사람이 희귀한 신인(골프 솜씨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하며, 팁도 두둑이 주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골프 솜씨나 팁이나 그저 그런 사람이며, 가장 밑바닥에 오는 사람이 최하층 천민(골프 솜씨도 형편없고, 인품도 천박하며, 팁도 인색한 사람)이다. 내가 캐디를 맡은 사람은 대부분 골프 솜씨도 평균 수준이고 팁도 평균 수준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골프 솜씨가 형편없지만 팁이 후한 사람과 골프 솜씨는 뛰어나지만 팁이 인색한 사람 사이에서 선택할 기회가 오면, 나는 팁이 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캐디 일 하면서, 돈벌이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전체 기간과 보스턴대학교 재학 기간에 계속 캐디 일을 하면서, 프란시스 위메트 캐디장학금을 받아 학비 일부를 지불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과학, 수학, 회계학 같은 일반 경역학 과목은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피해 다녔다. 대신 인문과목을 주로 수강했는데, 역사, 심리학, 정치학을 배웠고,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종교학, 고대 그리스철학을 공부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통계학 공부보다 역사와 철학 공부가 나의 주식투자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주식투자는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라서 만사를 철저하게 계량화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은 크게 불리하다. 만일 종목 선정이 계량화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거액을 벌 것이다. 그러나 주식시장에는 계량화가 통하지 않는다. 주식시장에 필요한 수학은(크라이슬러의 보유 현금이 10억 달러, 장기 부채가 5억 달러 등과 같이) 초등학교 4학년 산수로 충분하다. 논리학은 내가 월스트리트의 비논리성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나의 종목 선정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과목이다. 실제로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옛날 그리스 사람들처럼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둘러앉아서 말의 이빨이 몇 개인지에 대해 몇 날 며칠 토론했다. 이들은 직접 말의 이빨을 세어보는 대신 둘러앉아 토론하면서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월스트리트의 많은 투자자가 둘러앉아서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 토론하는데, 이는 회사를 방문해서 확인하는 대신 재무상태를 숙고하면 답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먼 옛날, 사람들은 해가 떠오를 때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닭이 울기 때문에 해가 떠오른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전문가들도 시장이 오르는 이유를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때 원인과 결과를 매일 혼동한다. 예를 들면,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느니, 슈퍼볼에서 어느 팀이 이겼다느니, 일본 사람들이 불행하다느니, 추세선이 깨졌다느니, 공화당이 선거에 이긴다느니, 주식이 '과매도'되었다느니 등이다. 나는 이런 이론을 들을 때마다 닭 울음을 떠올리게 된다.
1963년 대학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주식에 투자했다. 플라잉 타이거 라인을 주당 7달러에 매수했다. 캐디 일과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면서 집에서 통학했기 때문에 다른 경비를 줄일 수 있었고, 85달러짜리 차를 150달러짜리 차로 이미 교체한 상태였다. 그동안은 돈이 없어서 투자정보를 써먹을 수 없었지만, 마침내 투자할 돈을 모으게 되있다!
플라잉 타이거는 내가 아무렇게나 고른 종목이 아니었다. 비록 가정은 틀렸지만 끈질기게 조사해서 고른 종목이었다. 한 수업에서 내가 읽은 논문에 항공 산업의 장래가 밝다는 내용이 있었고, 플라잉 타이거가 항공화물 회사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 주식을 매수했지만, 그 이유가 주가가 오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군대와 군수품을 나르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주가가 오늘 것이었다.
2년도 채 지나기 전에 플라잉 타이거는 32.75달러에 도달했고, 내 첫 번째 5루타 종목이 되었다. 나는 이 주식을 조금씩 팔아서 대학원 학비로 썼다. 플라잉 타이거 장학금 덕에 와튼 스쿨에 다니게 되었다. 첫사랑이 장래 연애에 큰 영향을 미치듯이, 첫 종목이 장래 자금 사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면, 내가 플라잉 타이거를 선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대박 종목은 반드시 존재하며, 시장에는 이런 종목들이 더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보스턴대학 4학년 때 나는 사장 설리번의 권유에 따라 피델리티 여름 일자리에 응모했다. 설리번은 골프 솜씨는 형편없지만, 인품이 훌륭하며, 내게 팁도 두둑이 주는 사람이었다. 피델리티는 뉴욕 요트 클럽,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카네기 홀, 켄터키 경마를 보유하고 있었다. 피델리티는 투자업계의 본산이었다. 중세의 위대한 수도원에 수사들이 몰리는 것처럼, 재무상태표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근무하기를 꿈꾸었다. 여름 일자리 셋을 놓고 신청자 100명이 몰렸다.
피델리티는 뮤추얼펀드 판매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도 매달 100달러씩 피델리티 캐피털에 적립하고 있었다. 게리 자이가 운영하는 이 펀드는 유명한 고고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고고 펀드 두 개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는 네드로도 알려진 에드워드 존슨 3세가 운영하는 피델리티 트렌드였다. 네드 존슨은 미스터 존슨으로 불린 전설적인 창립자 에드워드 존슨 2세의 아들이었다.
네드 존슨의 피델리티 트렌드와 게리 차이의 피델리티 캐피털은 1958~1965년 동안 다른 펀드들을 압도적으로 누르면서 펀드 산업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거물들로부터 훈련과 지원을 받으면서, 나는 아이작 뉴턴이 한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네드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 오래전에, 그의 아버지 미스터 존슨은 미국인들이 투자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미스터 존슨은 자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주식에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다. 투자해서 돈을 벌면, 이 돈으로 더 많은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아내는 평생 바꾸지 않더라도, 주식은 바꿔야 한다." 늘 멋진 말을 만들어내는 미스터 존슨이 한 말이다. 나는 피델리티에서 일하게 되어 흥분되었다. 게다가 게리 차이가 뉴욕의 맨해튼 펀드로 회사를 옮긴 뒤 내가 차이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66년 5월 첫 주에 출근했을 때 925였던 다우지수는 내가 9월에 근무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당연히 린치의 법칙에 따라 800 아래로 곤두박질쳤다.